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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유예

미스신 2022. 4. 13. 02:01

슈휘


조슈아는 눈을 뜸.
태초의 기억은 웅웅거리는 소리, 눈이 시리도록 밝은 빛. 그리고, ... 좋은 꿈을 꾸었냐고 물어봐주는 한 남성이었음. 잘 잤어요? 라고 웃으며 물어봐주는 그 얼굴과 목소리가 아주 다정했다는 기억으로부터 조슈아 지수 홍의 기억은 출발했음.

자신을 준이라고 소개한 그 남성은 사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었음. 지구에서부터 쭉 자신을 보조해온 연구보조로봇이라며 앞으로도 연구 및 생활 전반을 보조할 예정이라고 했음. 연구 보조 로봇이라면 아주 오래 보았을 텐데 왜 나는 널 몰라? 하고 조슈아는 물었음. 정말로 그를 몰랐기 때문이었음. 준은 냉동수면 유지장치의 용액에 무언가 문제가 생겨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기억 소실 증상을 호소한다고 조슈아에게 알려주었음. 기억나는 것, 아는 것들을 다 알려주시겠어요. 좋은 꿈을 꾸었냐고 물어봤을 때와 똑같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준은 조슈아에게 질문했음.

기억하는 것은 전공지식, 이름, 그리고 가족들과의 추억 일부분 뿐. LA의 단란한 가족 출신 생명공학자 조슈아 지수 홍. 단 한문장으로 정리되는 기억이라니.. 말하면서도 절망스럽기 그지없었다. 30년을 살아왔는 데 남은것이 고작 한 줌 이었다. 그래도 제 눈앞의 로봇이 평온한 표정과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며 많은 연구진들이 기억 회복을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고 알려주어 조금은 안심했다. 혹시 모르니 박사님과 친분이 있는 다른 박사님들이 이 행성에 왔다면 자리를 주선해 보겠다고도 했다. 그가 있어 다행이라고 조슈아는 생각했음.

전공지식과 제 이름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므로 조슈아는 신행성에서의 연구에 큰 차질은 없었다. 가끔 동료 박사들을 기억하지 못해 곤란한 적이 있었지만, 다같이 어딘가가 비어있었으므로 저만 톡 튄다는 생각에 힘들지도 않았다. 준과 같이 출근해서, 그가 분류하고 정리한 자료를 분석하고, 할일이 끝나면 제 거처로 퇴근하고. 그렇게 신행성의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다른 박사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한솔 버논 최. 기계공학자. 저와 오래 안 사이라고 준이 말해줬다. (역시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조슈아 형, 하고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그를 보니 준의 말이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음.

한솔 역시 조슈아와 마찬가지로 기억 어딘가가 공백이 있었다고 했다. 다만 조슈아보다는 그 공백이 덜해서 (그러니 조슈아와 만나고 싶다고 먼저 준에게 말한 거였겠지만.) 조슈아에게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략적으로 알려줄 수 있었음. 조슈아는 다른 분야 박사들 중에서는 자신 외에도 윤정한, 최승철과 친분이 있었고(그들 역시 신행성에 도착했으니 한솔은 자신이 나중에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동일 분야에서는 전원우랑 공동 프로젝트를 종종 진행할 정도로 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음. (전원우는 현재 다른 행성으로 아직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생이별인가? 빨리 워프 기술이 개발 되어야 할텐데.)

아, 그리고 형.
형 로봇 있잖아. 진짜 형 로봇 맞아?
아니, 별건 아니고 어떤 구조인가 싶어서 엊그저께 만났을 때 점검도 할 겸 겸사겸사 봤거든. 근데 형 전공 연구에 도움이 되는 보조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오히려 내 로봇이어야 할 정도던데? (그니까, 기계공학 박사들이나 쓸 법한 프로그램들이 잔뜩 깔려있다는 뜻이지.)

생각해보면 준은 자료를 정리할 줄을 알았지만 자료의 분석을 기초적인것이나마 해 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로봇을 내가 지구에서부터 써 왔다고? 나는 최소 몇 년을 그를 사용해오며 단 한번도 내가 사용하는 프로그램들, 도움이 될 법한 모듈들을 설치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가? 조슈아는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기동을 멈춘 적이 거의 없는 로봇이라 데이터에 혼선이 생겼을 수도 있어. 한솔의 말에 조슈아는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춤.

그치만, 그런 것 치고는 나를 너무 잘 알았는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한 채로 기분좋은 만남을 다소 찝찝한 결론과 함께 마쳤다. 조슈아는 처음으로 준의 존재에 대하여 의구심이 들었다. 오직 나만을 준비된 것만 같은 로봇. 나의 모든 습관, 성격, 성향을 알면서도 정작 나의 일을 100프로는 도와주지 못하는 '연구보조로봇'. 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 무엇 하나 정답을 알 수 없었음. (심지어 한솔조차도 그에 대해선 기억하는 바 없었다.) 내일 만나기로 한 최승철과 윤정한이라면 답을 알려줄 수 있을까. 조슈아는 그리 생각하며 저를 다정하게 맞아주는 준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음.

준아.
네, 박사님.
너는 내 로봇이지.
그럼요. 저는 당신을 위해 움직여야만 하는걸요.

로봇은 인간의 말에 거짓을 답할 수 없었다. 저렇게 대답하는 걸 보면 내 로봇은 맞는데... 복잡한 심경을 애써 뒤로하며 내일 만나기로 한 최승철과 윤정한에 대한 설명을 준에게 들었음. 최 박사님은 절대 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시면 안되고요, 윤 박사님께선 조금 짓궂은 면이 있으세요. 세 분은 가장 친한 세 사람이셨죠. 분명 많은 것들을 얻어올 수 있을 거예요...

최승철과 윤정한. 도시환경공학을 전공한 두 박사이자 저의 대학 동기(비록 다른 과였지만)라고 소개해온 두 사람은 자신과 가장 친했다는 준의 말이 틀리진 않았는지 지금까지 만나온 박사들 중에 자신을 가장 편하게 대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음. 너 그럼 이것도 기억 안나? 이것두? 우리의 즐거운 추억은 정말 우리만의 것이 되었구나... (이쯤 승철은 눈에 띄게 서운해했다. 아니, 내 잘못이 아니잖아?) 승철과 정한은 정말 많은 기억들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운이 좋았지.. 아마 우리가 제일 기억이 많을걸? 정한은 이것저것 물어보는 승철과는 달리 조슈아를 가만히 뜯어보기만 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야 지수야. 근데 이상하지 않냐. 박사들의 개인 로봇들은 분명 화물선에 실려서 따로 오기로 했던 것 같거든. (그러고보니 지수라고 불러도 되냐? 아니 뭔가 안될 것 같은데.. 모르겠다.)

조슈아가 그 말에 승철을 쳐다보자 승철은 저는 모른다며 그치만 확실히 연구소에 보조 로봇들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기는 하다고 했다. 로봇이야 또 만들면 되니까 굳이 안 데려온거 아니냐, 하고 덧붙이는 말은 덤이었음. 실제로도 굳이굳이 로봇을 바리바리 챙겨 다니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고 승철이 말해주었음. 로봇에게는 감정 프로세스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생각보다 소모가 빨리 되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아예 보조로봇을 두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고. (이쯤 그러면 굳이 화물선에 개인 로봇을 넣을 필요가 없지 않냐? 로봇 수 자체가 적을텐데? 하고 정한에게 물었다. 정한은 그런가~~ 하고 폭탄발언을 해놓고서는 음료수 쪽쪽 빨았다. 조슈아는 어쩐지 그가 조금 얄미웠다.. 심란한 탓에 얄미움은 잘 느끼지 모했지만?)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지도 모르는 나의 보조로봇.
나를 무척이나 잘 알지만, 정작 연구보조로봇이라는 상품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는 성능의 로봇.
준.
넌 도대체 무엇이니.

조슈아는 승철, 정한과 헤어진 후 홀린듯 저가 타고온 로켓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전원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아무도 굳이 다시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은 채로 승인 서류 폴더에 방치되어잇을 그 기록들. 본 로켓은 신행성A의 개발을 위해 연구진들을 파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음을 밝힌다. 22xx년 출발하여 약 3세기 후 도착 예정이다. 50명의 연구원, 20명의 의료진, 20명의 생활보조인력, 10명의 훈련을 받은 일반인. 총 100명 승선 예정이며 사람들이 동면하는 동안 항로를 관리할 다섯 대의 로봇이 배치한다. ... 박사들의 개인 연구 장비는 화물선으로 미리 신행성A로 보내둔다. 이하 장비 목록이다.

...
없다.
저가 탄 로켓의 박사들은 연구보조로봇을 가진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준은 장비 목록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슈아는 서류의 스크롤을 겨우 내리고 올리기를 반복했다. 장비 목록, 그리고 이것은 탑승 인원 목록, ... 내 사진, 승철과 정한의 사진, 한솔의 사진, 그리고, ...

박사님.

준의 사진. 네 사진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조슈아는 어렴풋이 한 사실을 떠올려냈다. 제 손을 잡아오는 다정한 손길. 때로는 그 손길로 저를 껴안기도 했고, 쓰다듬기도 했으며, ... 제 눈앞의 로봇과 똑같은 얼굴로 웃어주었고 똑같은 목소리로 박사님, 하고 부르는 대신 지수. 하고 불러줬던 그 목소리를.

준, 너는 누가 만든거야?
문준휘 박사님께서 만드셨어요.

로봇은 물어보지 않은 것을 굳이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여태껏 준은 문준휘의 존재를 조슈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문준휘를 기억하지 못하는 조슈아는 절대 묻지 않았을 질문에 준이 대답하여 문준휘의 존재를 못박아버린다. 멈춰있던 작별의 초침이 움직인다. 조슈아는 비로소 문준휘와의 이별을 시작해야만 했다. 준은 조슈아에게로 다가와 스크롤을 마지막까지 내려주었음. 다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유일하게 온전한 제가 이 서류의 결재를 했어요. 보세요.

하선 인원, 총 98명.

문 박사님께서는 두번째로 깨어난 분이셨어요. 첫 번째로 깨어났던 사람이 그를 깨웠죠. 동면 유지장치에 약간의 결함이 생겨 한 사람이 깨어났고, 그는 일생을 바쳐 그 결함을 수정하는 데에 성공하셨어요. 이 과정에서 동면자들의 약간의 기억 손실을 감수하셔야 했지만... 문제는 하나가 더 있었죠. 동면 유지장치뿐만이 아니라 우주선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항로는 뒤틀리고, 언젠가는 추진기도 멈춰 우주를 영원히 배회할 운명이었죠. 그래서 첫 번째로 깨어났던 그 사람이 문 박사님을 깨운거예요. 박사님께서는 아주, 아주 권위있는 로켓공학자셨거든요.

...

이후는 뻔한 이야기였음. 문준휘는 일평생을 바쳐 로켓의 결함을 고쳐내었고, 이후에도 로켓을 꾸준히 관리해줄 로봇의 필요성을 느껴 선내의 배치된 다섯개의 로봇을 싸그리 뜯어 하나의 고성능 로봇을 먼들어냈고 그것이 JUN이었다는 이야기. JUN이라는 이름 자체도, 지금의 생김새도 문준휘가 죽기 전에야 주었다고 했다. 왜 하필 마지막에 자신을 닮게 만들었을까, 준휘는? 그 물음에 준은 문 박사가 제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을 이야기했다.

두 분이서 약속을 하셨다던데요. 오랜 동면 후에는 잘 잤냐고 물어봐 주기로. 거기에 약속된 대답이 또 있었대요. 박사님은 그 약속을 통해 당신이 자신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제게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그를 위해서는 제가 박사님의 얼굴을 할 필요가 있었죠. 만일 박사님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박사님에 대해 알려드리고, 그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왜 바로 말해주지 않았어?
당신이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기억하지 못하면 알려줘야 했다며.
문 박사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이 박사님의 죽음을 무겁게 여겨봤자 얼마나 무겁게 여기겠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요.

제멋대로인 로봇이네. 로봇이 이래도 돼? 오랜 딥러닝 끝에 이정도의 '융통성'은 생겼어요. 박사님의 마지막 명령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늘 그것을 궁리했었죠.

조슈아.
그거 알아요?
박사님은 당신을 무척 사랑하셨어요.
박사님께선 본인의 이야기를 하시는 법은 잘 없으셨어요. 그치만 당신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해주셨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를 기억하는 상태에서 애도를 해주길 바랐어요. 그리고, 이게 제대로 된 작별이라고도 생각했고요.
조슈아. 울어요?
그가 보고싶다고요.
저도요.
그리고 박사님께서도 당신을 많이 보고싶어하셨어요..
마지막까지도요..
평생 그의 꿈을 꾸겠죠.. 네. 그럼요..


읽어도되고 안읽어도되는 사족 (준봇시점? 서술? 같은건데 이걸 어떻게 낑겨넣을지 졸려서 잘 모르겠음 ㅈㅅㅈㅅ)

더보기

참고로 문준휘는 준봇에게 자신을 대신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준봇은 아마 이게 질투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조슈아의 남은 일생을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심술. (물론 준봇은 조슈아보단 조슈아를 사랑하는 문준휘를 더 사랑했다. 창조주기도 했고.. 준휘는 몰랐지만??)

그래놓고서는 마지막에 그냥 자신인 척 살라고 했다. 준봇이 아니라 문준휘로 살아도 좋다고 했다. 준봇은 문준휘로 살지 말 것, 혹은 문준휘로 살 것. 어느쪽이 박사의 진심인지 모른다. 근데 아마 둘 다 진심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질투가 났고, 결국에는 자신 없이 살아가야할 조슈아의 처지에 서글퍼졌으리라. (자신 역시 조슈아 없이 여생을 보냈으니..)

그러나 준봇은 문준휘가 얼마나 조슈아를 사랑했는지 봐왔기 때문에.... 문준휘가 슬퍼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로 한다.

문준휘는 제 자리를 남이 대체하지 않길 바랐고, 동시에 조슈아가 갑작스런 이별에 문준휘라는 사람을 조슈아의 여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슬픔으로 남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준봇은 로봇으로 살길 택하면서, 조슈아에게 문준휘와 이별하기까지의 유예를 주기로 한다. 그 스스로 문준휘를 떠올려내고, 그 순간에 저는 문준휘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그가 문준휘를 회상하며 이미 없는 사람과 작별하는 과정을 옆에서 도와준다. 준봇은 이것이 저가 임무를 수행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결론내렸다. 물론 이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별이라는건.

가능한 한 상냥하게 이루어지면 좋으니까.

비이성적, 비효율적 판단. 감정 프로세스가 미약하게나마 구성이 된 걸까. 준봇은 생각한다.


좋은 꿈 꾸었나요?
응, 네 꿈을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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